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북 사건 (문단 편집) === 손영근과 일본군의 교전 === 한편 열하성 준화현에서는 항일구국군 군장을 칭하는 손영근의 부대 3~5천명 가량의 병력이 주둔하며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손영근은 원래 [[열하사변]]이 발생한 직후인 1933년 3월, 자신의 고향인 흥륭현 황화리에서 농민들을 조직하여 반일 폭동을 일으켰던 인물이었다. 그는 <민중군>을 조직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수행했고 1934년 2월, 중국 공산당 화동특위가 특위위원 왕평륙을 손영근 부대에 파견하여 그들의 항일 투쟁을 지도하고 그들로 하여금 [[중국 공산당]]의 영도를 받게 했다. 손영근은 공산당의 지도 아래에 민중군을 항일구국군으로 개편하여 자신을 군장으로 칭하고 산하에 2개 군단을 거느려 수천명의 부하를 지휘했다. 이들은 1934년부터 1935년까지 100여 곳의 일본군 거점을 습격했으며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합쳐 1만 5천명을 섬멸했다고 주장했다. 일본군은 이들을 수차례 토벌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준화현은 [[당고정전협정]]에 따라 비무장 지대로 설정되어 일본군도 국민혁명군도 진입할 수 없는 곳이었는데 손영근은 이 점을 노리고 일부로 이곳을 근거지로 삼은 상태였다. 1935년 5월 초, 일본군이 다시 한번 손영근 토벌을 시도하자 손영근은 부대를 이끌고 만리장성을 넘어 준화현 동북 일대에로 옮겼다. 이에 5월 5일 오후 3시, 열하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준화현의 중국 보안대대에 알려 자신들이 손영근 부대를 토벌할 것이니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장성 25리 뒤로 철수하여 나문욕 일대의 방비를 자신들에게 맡겨 달라고 요청했다. 보안대는 이를 수락하였으나 25리를 철수하면 준화성 전체를 일본군에게 내주는 격이라서 15리만 철수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나문욕에 사령부를 설치하였다가 다시 삼도하로 옮겼는데 준화현 보안대에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5월 15일, 일본군과 국민정부가 방비 문제를 협의하던 사이 손영근 부대가 장성으로 들어가 준화현장 하효이에게 탄약을 보급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효이는 이를 거절하고 보안대를 풀어 일본군과 함께 손영근을 공동토벌하였다. 이에 손영근은 더 버티지 못하고 철수했으며 5월 20일 새벽, 다시 장성 안으로 진입하려 했다. 이때 일본군 스기하라 혼성여단이 다시 손영근을 추격하면서 2시 반에 준화성 일대에서 중국군 보안대와 함께 손영근을 포위했다. 결국 5월 24일, 손영근을 비롯한 항일구국군은 포위망을 뚫는 데 실패하고 대부분 전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